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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눈은 혁명처럼
    첫눈은 혁명처럼
    저자 송종찬 | 출간 2017.02.06
    정가 9,000원 | 정보 160쪽 / 신국변형(125*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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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부친 첫눈의 감성

 

문예중앙시선 48호는 송종찬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첫눈은 혁명처럼』이다. 이홍섭 시인은 해설에서 “해설 쓰는 책무를 망각한 채 각성과 설렘에 빠져들며 시를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표현할 정도로 시인의 짧은 시들은 정치한 리듬 속에서 생생한 감동을 전달하고 있다. 

십년 만에 내놓은 이번 시집은 광활한 러시아의 설원과 압록강과 두만강을 맞대고 있는 국경지역 등을 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일상에서 발현되는 소소한 문제의식을 뛰어넘어 확장된 북방의 공간 속에서 새롭게 발견한 아름다움, 순수한 세계를 열망하는 마음,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때론 간결한 형식 속에 때론 유장한 리듬 위에 담아내고 있다. 짧은 형식이 제어하는 시적 긴장, 고전적 품격, 비장미를 두루 갖춘 시편들을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면 이용악, 오장환, 백석 등이 선취했던 북방의 정서와 대륙적 상상력을 만나는 귀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사랑의 회복을 열망하는 작고 밝은 손길

 

시인은 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고 2011년부터 러시아에 체류해 왔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러시아 시편들은 체험을 토대로 쓰인 시들인데, 자연과 시인의 감성, 세계관이 일체를 이루면서 완숙된 고전적 품격을 보여준다. 아래 시는 이러한 화음이 만들어낸 절창이다. 

 

갈 데까지 간 사랑은 아름답다

잔해가 없다

그곳이 하늘 끝이라도

사막의 한가운데라도

끝끝내 돌아와

가장 낮은 곳에서 점자처럼 빛난다

눈이 따스한 것은 

모든 것을 다 태웠기 때문

눈이 빛나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기 때문

촛불을 켜고

눈의 점자를 읽는 밤

눈이 내리는 날에는 연애도

전쟁도 멈춰야 한다 

상점도 공장도 문을 닫고 

신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

성체를 받듯 두 눈을 감고

혀를 내밀어보면 

뼛속까지 드러나는 과거

갈 데까지 간 사랑은 

흔적이 없다

--「눈의 묵시록」 전문 

 

북국의 겨울은 길다. 육 개월 동안 눈이 내린다. 시인은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보면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생각하고, 살의와 욕망을 내려놓은 평화를 생각하고, 마침내 신의 음성에 가닿는다. 시인은 폭설 속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의 기도를 올렸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시인이 러시아에서 일군 감성의 총체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절대 고독 속에서 ‘눈’을 비유를 위한 소품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까지 확장시켜놓았다. 이번 시집의 알파라 할 수 있는 러시아 시편들은 혁명과 사랑과 성스러움을 통해, 훼손된 세계에 대한 안타까움과 훼손되지 않은 세계를 향한 열망을 그려낸다. 이 안타까움과 열망은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를 숙고하게 하면서 시적 감동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전쟁과 혁명을 모두 겪은 할머니가 지하철역 앞에서 

들꽃으로 엮은 제비꽃 다발을 팔고 있었지요

 

교수였던 남편은 혁명의 깃발 속으로 사라져갔다

밤 기차로 전선에 끌려간 아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마른 빵을 사려고 줄을 선 적이 없는 철없는 소냐를 위해

오십 루블에 꽃다발을 사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똑똑한 남자는 혁명 때 용감한 남자는 이차대전 때 다 죽고

이념과 폭격 속에서 끝끝내 피어난 할머니와 들꽃과 소녀와 

--「돌아오지 않는 봄」 전문 

 

위의 작품은 혁명과 전쟁 속에 남편과 아들을 차례로 잃은 할머니가 생계를 위해 꽃다발을 팔고 있는 현실을 통해 이념과 전쟁, 그리고 생명의 존귀함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 20세기 들어 러시아에서 발생한 사회주의 혁명과 세계 2차대전은 역사의 큰 수레바퀴였고, 두 축의 수레바퀴 아래서 피를 흘린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문학과 예술이 주는 감동의 깊이는 인간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다. 혁명 때 남편을 잃고, 전쟁 때 아들마저 잃었지만 꿋꿋하게 살아 어쩌면 ‘오지 않을 봄’을 기다리는 할머니의 비극적 열망 속에서 삶에 대한 경건함을 다시금 느낄 수 있다. 위의 시가 오랜 여운을 남길 수 있었던 데는 내용과 형식의 조화가 기여한 점도 크다. 이 시에서 1연 2행의 형식은 감정의 절제와 더불어 대상과의 적절한 거리 유지에 도움을 주면서 시가 산문화 되는 것을 제어하고 있다. 이번 시집에 실린 많은 작품들이 주는 견고한 느낌은 이러한 내용과 형식의 조화가 빚어낸 것이다. 

러시아 시편들에서 보여준 순수한 세계를 향한 열망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 서려 있는 압록강과 두만강 변의 국경 마을을 배경으로 한 시편들을 통해 통일의 염원으로 나아간다. 

 

목포에서 신의주 939킬로미터

차로는 너덧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

갈 수 없는 접경이 거기까지라는데

압록강이 내다보이는 집안시

묘향각에서 스쳐 지나쳤던 그대

그날이 오면 여기로 오시라

목포시 유달동 국도 1호선 원표 아래로

볕 고운 자리에 돗자리 깔고

모두부 설어 넣은 김치찌개 앞에 두고

하염없이 그대 바라보리니

발 아래 파도치는 유달산에서 

개마고원의 눈 덮인 겨울 숲까지 

이름만 들어도 살내음 고운 그대

그날이 오면 한달음에 오시라

국도 1호선 화강암 아래로

신의주발 목포행 막차에

만주 연해주를 떠돌던 사연들도 

북방의 눈발에 실려 오리니

갯내음 속 기별처럼 동백꽃 피어나고

목포에서 판문점 499킬로미터

갈 수 있는 길이 거기까지라는데

--「국도 1호선」 전문 

 

통일의 염원을 담고 있는 이 작품에서 돋보이는 것은 유장한 리듬이다. 시인은 마치 대중 낭송을 염두에 둔 듯, 연 구분 없이 행갈이만으로 리듬을 만들어내면서 감정을 고양시키고 있다. “그날이 오면 여기로 오시라” “그날이 오면 한달음에 오시라” 등의 구절은 이러한 고양을 추동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리듬과 형식은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시 「땡긴다」, 「고려촌 백주」, 「타향살이」 등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서태후가 즐겨 먹던 북경 오리보다 / 살얼음 간간이 밴 묵은지가 땡기고……산삼주에 총각김치 그녀들이 건네는/ 술잔에 핏줄마저 땡겨오는데”(「땡긴다」)

“반도의 머리 두만강 자락이 휘도는 / 훈춘 네거리 식당에서 한식을 먹는다……타향이 어디 있어/ 우리 가락 우리 노래 살아 있다면/ 그 곳이 따스한 품속이지”(「고려촌 백주」), 

“연길시장 단고깃집에서 / 눈이 멀도록 백주를 마신 후 / 강바람을 가르며 노래방으로 갔다...... 백두산 자락에서 듣던 아리랑 / 아리랑 아리랑의 낭랑한 가락이 / 해란강을 적시고도 남았을 듯” (「타향살이」) 

 

민족의 비애가 서린 압록강과 두만강 변의 국경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들은 민족과 국가와 고향에 대해 숙고하게 만들면서, 1930~40년대에 민족적 비애를 선취한 이용악과 오장환, 그리고 백석의 시세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러한 면모는 우리 시에 귀한 북방정서 및 대륙적 상상력과 결합되어 우리 시의 지평을 크게 넓히고 있다. 

시인은 광활한 시베리아에서 출발해 분단국가의 비극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국경지대까지 예리한 감각의 촉수를 드리우고 있지만, 궁극의 열망은 조국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랑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내가 울고 있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는 듯했지

 

가지를 빠져나간 바람이

내가 흔들릴 때 당신은 

무얼 했느냐며 따지는 듯했지

 

나는 들끓는 태양 아래

키 큰 선인장 사와라처럼 서서

설산을 그리워하였거나

 

북국의 눈 내리는 마을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사막의 꽃을 그리워하였거나

 

첨탑을 넘어온 눈발이

내가 얼어붙고 있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냐며 울부짖는 듯했지

--「어둠 속으로」 전문

 

시인은 몇 년 동안 디아스포라가 되어 국경 밖에서 지냈다. 하지만 그가 돌아가야 할 곳, 그리고 사랑해야 할 것들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음을 이 시는 보여준다. 어쩌면 사철 햇살이 따사로운 한반도가 시베리아보다 더 추운 곳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고국에서 들려오는 불편한 소식들 때문에 때로는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함께 아파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국경이 사라져버린 시대에 만주, 연해주는 먼 곳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몸부림쳐야 하지만 분단은 우리가 뛰어넘지 못할 공간은 아니다. 첫눈을 기다리는 순정한 마음, 자작나무의 환한 빛, 폭설을 뚫고 피어나는 시베리아의 들꽃 같은 기운만 있다면 봄은 끝내 오리라는 것을 이 시집은 보여주고 있다. 

 

 

시인의 말

 

대륙에 갇혀 살다 보니 시가 짧아졌다

어차피 모두 채울 수 없는 공간이었다

……

 

수식어가 어설퍼지는 시베리아 벌판에서

나는 녹아 없어질 한 점 눈발이었거나

먼 길 떠나는 밤 기차의 기적이었거나

……

 

설원의 발자국 같은, 밤새워 쓴 시들을

먼 눈발들이 다가와 지우고 또 지웠다

 

 

책 속으로  

 

날밤을 새우고 있는 게지

사랑을 잃고 밤새 깡술을 마시거나

하늘에 잉크를 뿌려놓은 듯

만년필을 꺼내 편지라도 써야 하는가

은세계 공원으로 가는 다리 위에는

수줍게 반달이 걸려 있는데

레닌 동상 너머 태양은 유정처럼 불타고 있다

해가 지지 않았는데 달은 떠오르고

북국에서는 밤도 사무쳐온다

달무리에 젖어 드는 저녁놀

겨울을 생각하면 잠들지 못하겠더라

밤 기차는 갈비뼈를 흔들며 지나고

하늘에 매달려 천장화를 그리고 있는 듯

지평선 위 구름에 번지는 파스텔화

천지창조 같은, 눈이 멀도록

그대를 생각한다는 것

 

--「백야」 전문

 

 

누가 사랑을 물어온다면

시베리아로 가 반란처럼 피어난

엉겅퀴 한 송이 보여주리

 

벌판에 열 달 내내 눈 쌓이고

자작나무 숲에 안개가 덮여도

원색의 야생화는 피어난다

 

유형의 길을 가던 님 따르다

눈밭에 나뒹굴던 여인처럼

길가에 맨발로 피어난 들꽃

 

여름은 짧고 길은 어두워도

그대에게 가야만 하는 길

사랑은 들꽃처럼 붉어지고

 

누가 사랑을 물어온다면

그냥 시베리아로 달려가

엉겅퀴 한 송이 물들여주리

 

--「시베리아의 들꽃」 전문

 

 

사상을 팔던 혁명기가 있었지

협동농장에서 노동을 팔던 소련도 저물고

몸을 파는 자본의 시대가 왔지

 

한 끼의 마른 흑빵을 사기 위해

영혼마저 팔고 돌아서던 길

발 아래 밟히던 첫눈은 어떠했을까

 

낙엽의 거리에 눈이 내리면

발자국 무성했던 대지도 시리지 않겠다

 

간밤 당신이 그리 오시려고

자다 깨다 반복했었는지

창밖 내미는 손길 위에 첫눈

 

--「첫눈은 혁명처럼」 전문

 

 

갈 데까지 간 사랑은 아름답다

잔해가 없다

그곳이 하늘 끝이라도

사막의 한가운데라도

끝끝내 돌아와

가장 낮은 곳에서 점자처럼 빛난다

눈이 따스한 것은

모든 것을 다 태웠기 때문

눈이 빛나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기 때문

촛불을 켜고

눈의 점자를 읽는 밤

눈이 내리는 날에는 연애도

전쟁도 멈춰야 한다

상점도 공장도 문을 닫고

신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

성체를 받듯 두 눈을 감고

혀를 내밀어보면

뼈 속까지 드러나는 과거

갈 데까지 간 사랑은

흔적이 없다

 

--「눈의 묵시록」 전문

 

 

겨울도 아닌 것이 봄도 아닌 것이

그대를 사랑하여 아프다

가는 눈발의 춤사위 따라가다 보면

솜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발끝

올듯 말듯 올듯 말듯 

눈발에 길이 막혀버렸는가

기다리지만 그대는 쉬 오지 않는다

얼어붙은 우물가 꽉 막힌 펌프에

떨리는 두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속울음이 솟구칠 것 같은

그대를 사랑하여 겨우내 눈 내리고

눈에 갇혀 오시지 못하는가

인간도 아닌 것이 짐승도 아닌 것이

그대를 사랑하여

 

--「꽃샘추위」 전문

 

 

울컥

 

겨울나무가 얼어 죽지 않으려면

울컥하는 것이 있어야겠다

마룻바닥에 울리는 통성기도나

남몰래 흘리는 눈물 같은 것들이

뿌리에서 가지 끝까지 밀고 올라야겠다

눈과 눈이 고사리손을 마주잡고

빈 들을 건너가는 겨울밤을 나려면

울컥하는 것들이 있어야겠다

다시 볼 수 없는 북방의 여인이나

갈 수 없는 설움들이 목울대까지 차올라

얼굴에는 신열이 올라야겠다

빈 겨울들에는 바람이 들이치고

쓰러지는 겨울나무들이여

 

  --「울컥」 전문

송 종 찬

 

남도의 바닷가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다. 1993년 《시문학》에 「내가 사랑한 겨울나무」외 9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그리운 막차』, 『손끝으로 달을 만지다』외 러시아어 시집 『시베리아를 건너는 밤(Транссибирские Ночи)』이 있다. 

1부

 

그대의 공화국 

백야 

울컥 

시베리아의 들꽃 

태양의 기억 

첫눈은 혁명처럼 

일요일의 평화 

시월 

혹한, 새벽은 

저기압 지대 

설원의 불빛 

돌아오지 않는 봄 

눈의 묵시록 

토고 호수 

그리운 열대

스베타 

얼음낚시

어둠 속으로

지평선은 없다

타이가 

야간 비행

겨울을 건너는 법 

CCCP 바르 

야생화 

야스나야폴랴나 

대륙의 밀실에서

자작나무 

카레이스키 

불면 

그 겨울의 끝

 

 

2부

 

국도 1호선 

방천길 

땡긴다 

고려촌 백주 

 

 

이매진imagine 

초원 지대 

타향살이 

국경 

하지 

동지 

바람의 발자국 

크레타 

0℃에 내리는 눈 

작은 돛배 ? 이별을 위하여 

독작 

 

3부

 

꽃샘추위 

봄의 서정

유월에 

서릿발 

별을 보며 

주천에 들다 

천진암 가는 길 

고도를 기다리며

휴가 

상사화 

교대 근무 

마중 

맨발 

폐사지에서 

불면 

오지 않는 자를 위하여 

성찬 

회사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 

수련 

 

 

해설 

프렌즈 베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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