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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이 문예중앙에서 출간되었다. 2012년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를 출간한 이후 5년 만이다. 화려하고 파격적인 작품보다는 서정적이고 단단한 작품들을 선보여온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서 쓸쓸하면서도 섬세한 서정의 숨결을 독자들에게 전한다.

총 4부로 구성된 이번 시집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들은 너와 나 사이의 거리를 통해 바라보는 세계의 이미지들이다. 너와 내가 한밤에 셔틀콕을 치는 동안에, 캐치볼을 하는 동안에, 시소를 타는 동안에, 물가에서 발을 씻는 동안에, 우리가 머무르는 이 세계는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을 통해 독자들은 나와 너 사이의 거리가 서로의 부재를 확인하는 과정이며, 우리가 머무는 이 세계가 융성해지는 폐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인이 만들어낸 이러한 부재의 이미지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별들이 되어 반짝여보는 순간으로 향한다. 

이승희


저자 이승희는 1997년 계간 《시와사람》 신인상 수상,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창비, 2006),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문학동네, 2012) 등이 있으며, 동시집과 동화집 등을 펴냈다.

1부
물가에서 우리는
모든 가구는 거울이다
식탁의 목적, 물컵
식탁의 목적 혹은 그 외의 식탁들
식탁의 목적, 냉장고 불빛
식탁 자리
식탁의 목적, 그러니까 우리는
식탁의 오래된 풍경
여름
여름에게 하고 싶은 말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5
종점들
당신이나/그 앞에 앉은 나나/귀신같아서 좋은 봄날의 소풍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7
여름비

2부
우리는 모두 물방울이 아니다
공원
캐치볼
미끄러지는 세계
공원 2
한밤의 셔틀콕
폐허는 언제나 한복판에서 자라고
살이 부러졌다
시소의 세계에서 우리는
떠내려가는 금요일
43일의 43일이 43일 동안
사과 상자는 쌓여가고

3부



잠 잠

홀연
그네
워터볼
또다시 종점들
패전 처리 투수
재워주고 싶어
붉은 방
학교생활
학교생활-칠판
학교생활-상담실
익어가는 것들은 왜 매달려 있는가

4부
자전
화분 혹은 시인 케이
달리는 저녁
당신의 세계
두 번째 엽서
하염없이
파주
파주 2
파주 3
파주 4
파주 5
파주 6
파주 7
파주 8
파주 9
파주 11
파주 12
세상에서의 부재가 되는 일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은 너와 나 사이에서 발생하는 부재의 이미지를 담담한 목소리로 담아낸다. 이 부재의 대상은 네가 되기도 하고 내가 되기도 하며 종종 세계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이런 쓸쓸함이나 불안함에 대한 정서는 종종 너와 나 사이의 놀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공을 던진다
어디에도 닿지 않고
그만큼씩 나의 뒤는 깊어진다
내가 혼자여서 나무의 키가 쑥쑥 자란다
내가 던진 공은 자꾸만 추상화된다
새들은 구체적으로 날아가다가 추상화되고
생기지 않은 우리 
속으로 자꾸만 공을 던진다
거짓말처럼 저녁이 오고 밤이 오고
오는 것들은 일렬로 내 앞을 지나간다
칸칸이 무엇도 눈 맞추지 않고
잘 지나간다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 추상적이다
나는 불빛 아래에서 살았다 죽었다 한다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세계가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여전히 공을 던진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 「캐치볼」 전문

캐치볼은 혼자서 할 수 없는 놀이, 공을 던져주고 받아주는 상대가 있어야 할 수 있는 놀이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너는 부재하고 있다. 네가 없기에 우리 또한 생기지 않은 상태로 나는 자꾸 속으로만 공을 던지게 된다. 이러한 모순된 과정 속에서 모든 것들은 추상화되어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을 던지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혼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는 결국 ‘너’와의 소통의 단절을 의미하는 구절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부재를 통한 아이러니하고도 쓸쓸한 유희의 순간은 이번 시집의 여러 시들에서 발견된다. 그 순간은 너와 내가 시소를 타는 동안 잠시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시소의 세계이기도 하고, 너와 내가 배드민턴을 치면서 눈으로 셔틀콕을 치는 동안 잠시 보였다가 사라지는 세계이기도 하다. 결국 이러한 부재에 대한 반짝이고도 쓸쓸한 인식들은 내가 속하지 않은 공원의 세계, 세상에서의 부재로 향한다. 말하자면 이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별들로 반짝여보는 일이다.

세상에서의 부재가 되는 일
세상에 없는 나를 만나는 일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5」 부분

여름, 융성해지는 폐허의 계절
시인에게 여름은 폐허다.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이라는 시집 제목도 그렇지만, 시집 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이 여름이라는 계절이다. 여름이 폐허라는 말은 모순적이기에 듣는 이에게 의아함을 불러일으킨다. 여름은 모든 생명들이 자신의 생명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융성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름은 당신이 이 세상에 보낸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장. 
-「여름」 부분

나는 그렇게 시들어가는 꽃과 살았다 반쯤만 살아서 눈도 반만 뜨고 반쯤만 죽어서 밥도 반만 먹고 햇볕이 환할수록 그늘도 깊어서 나는 혼자서 꽃잎만 피워댔다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5」 부분

질문과 대답이 그렇게 여러 해를 떠돌고서야 여름을 기다리곤 했지 그래도 여름이 돌아오지 않으면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 잊으면 되고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17」 부분

그래 집에 가자 내일부터는 여름이 아니라고 말하자
이 생은 벌써 끝났다고 말하자
-「학교생활」 부분

이러한 융성의 계절에 시인은 오히려 폐허와 부음과 유족에 대한 생각 들을 떠올린다. “햇볕이 환할수록 그늘도 깊어서”라는 구절에서 언뜻 비치듯, 넘치는 빛 속에서 자라나는 존재의 가장 젊고 생생한 한 순간이 역설적으로 그 존재가 늙고 죽어갈 때의 모습을 그림자처럼 드리우고 있기 때문일까. 많은 경우 이번 시집 속에서 여름은 죽음이거나 또는 죽음을 환기시키는 삶의 시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것들에서 두려운 감정을 느끼기보다는 쓸쓸하면서도 따뜻한, 체념과 기다림이 뒤섞인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아마 그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이라 불리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은 식탁 위에서, 공원에서, 학교에서, 혹은 파주라는 구체적인 공간에서 ‘혼자’, 또는 부재하는 ‘우리’에 대한 섬세한 언어들로 가득한 시집이다. 나와 너 사이의 거리, 생과 죽음의 간극에서 느껴지는 슬픔이 마냥 쓸쓸하지만 않은 것은 황정산 평론가가 해설에서 밝히고 있듯 “서로 간에 멀어짐을 허용할 때 서로는 별빛으로 반짝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불가능한 미래의 기호들

높고 쓸쓸한 시인의 행보가 시집 곳곳에 다양한 무늬로 새겨져 있다. 섬세하고 따뜻한 서정의 숨결이 밀어 올리는 ‘혼자’의 대척점에 ‘우리’가 있다. 시집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우리’는 불가능한 미래의 기호이다. 격절과 고립의 시공을 넘어서기 위해 시집 도처에서 결핍과 불우의 ‘우리’가 아프게 빛난다. 식탁 앞에서 혼잣말을 하며 “내게 없는 사람”을 향해 기울어진 존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별들로 반짝”이며 “점 하나가 붙잡고 있는 세계”를 견뎌내는 중이다. “나는 파주 안에 있고 나는 파주 밖에 있으”면서 “융성해지는 폐허”. 그 역설의 공간을 온몸으로 살아내며 시적 주체는 “나 없이도 식탁은 식탁”인 현실에 발 딛고 서 있는 것이다. 존재의 은밀한 비의와 오뇌가 연과 연, 행과 행 사이 그 무한의 자리에 무형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시집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은 지금 이곳에서 미지의 강역을 비추는 순정한 ‘별빛’ 결정체이다. -홍일표 시인 추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