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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심상]을 통해 등단한 이정란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이를테면 빗방울』이 문예중앙에서 발간됐다. “리얼리즘적 문법과 자연적 서정의 세례 속에서 오랫동안 타자/세계와의 시적 교감을 모색해왔다”는 평을 받은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시를 ‘쓰는 자로서의 나’에 대한 문제의식을 더욱 확장시킨다.

시인에게 시 쓰기란 “아직 누구도 보지 못한 흙과 얼음의 무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며, 그 지난함이야말로 “시를 썼다는 흔적과 시인 자신을 지워내야만 하는 이율배반의 여정”일 것이다. 이정란 시인은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탄생한 시는 시인의 말마따나 “배고픈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음식물의 떨림” 같을 테니 말이다. 

이정란

서울에서 출생하여 1999년 <심상> 신인상에 당선해 등단했다. 시로 문단에 나왔지만 수필, 지도서 등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현재 중앙대 예술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1부
나이테 
석류
교차
의자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목소리
회오리
한 그루 나무에서 만 그루의 어둠이
이를테면 빗방울
꽃의 눈물
노래하는 블루
모과와 새
산수유
포괄
새에 대한 어둠의 견해
어떤 일부분
홀로 여럿이

2부
유리에 비친
깃털
부류
격자문
워킹
그 남자와 란

소나무와 폭설
먼지
무대 예감
귀를 다루는 자화상
햇빛에 녹는 고양이
제19장 흐린 날
달과 시간
듯이
주인공-변주

3부
함부로 사랑의 손수건
크리스 보티의 트럼펫
아프로디테
문지 시집 닮은
촛불
15분
삼면이 앵무
마리안느에게 :
돋아나는 처녀
만삭
달빛 터미널
우주의 저녁
면도
붉은 안개
당신
파묘

4부


파문
처음 듣는 새
빌린 장갑
고양이 피는 장미밭

렌즈
얼굴보다 나뭇잎
드르니항에서 보낸 무쉬의 날

설원
달의 흡연
새로운 천사
안개라는 소리
꽃차
남겨진 새
해설/ 꽃과 천사 그리고 인간으로서 살아내기 -- 기혁, 시인·문학평론가 

간절하게 자연을 비껴 나가는 세계

1999년 [심상]을 통해 등단한 이정란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이를테면 빗방울』이 문예중앙에서 발간됐다. “리얼리즘적 문법과 자연적 서정의 세례 속에서 오랫동안 타자/세계와의 시적 교감을 모색해왔다”는 평을 받은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시를 ‘쓰는 자로서의 나’에 대한 문제의식을 더욱 확장시킨다.

시인에게 자연은 “그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할 만큼 절대적인 대상이다. 시를 쓰는 시인에게 있어 절대적 자연이란 언제나 마주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최고의 시란 시인이 쓴 시가 아닌 그저 ‘(자연을) 받아 적어 내려간’ 시일 테지만, 그러한 절대적인 시를 가정하기 위해서는 시인 자신의 쓰기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자연 앞에서 시인은 ‘쓰는 자’이면서도 ‘받아 적는 자’인 모순적인 존재에 머무르며, 도정 자체가 모순인 시 쓰기는 언제나 요원하다. 시인은 “입으로 입으로 광맥을 파헤치는” 광부 같은 태도를 가져보기도 하지만 갱도에서 얻는 건 “끝내 붉은 기억만/영 캐럿”(「석류」)뿐이다. 의자에 앉아 시를 쓸 때 시인은 “마침내 사람이 사람이 되”지만 또한 “쓰지 못한 무수한 사람”(「의자」)이 겨우 될 따름이다.

누구는 과육을 먹고 누구는 향기를 마시고

삼키는 열매도 있고 터뜨려 먹는 열매도 있다

바다 단전에 찰싹 붙어 어둠을 빨아먹는 밤배는 물의 열매
보름달로 익어 심해를 밝힌다

달에서 빼낸 씨를 가루 내
처음 우린 물에선 유황 내가 나고
그다음 우려낸 물에서는 갯내가 난다

향은 열매를 통과해 영근 물의 리본

지층의 광맥을 지나 대지의 심장에 가는 촉수를 대고 몸을 떨었던

공기의 낱장을 너무 빨리 넘기지 마라

장미는 향을 얻기 위해 거듭 깨어나
수십 장의 살을 바르고 코끝에 가시를 세운다

발밑에 버린 새빨간 면도날에서 그 향을 맡는 자

이를테면 빗방울

--「이를테면 빗방울」 전문

그간 자연을 다룬 많은 시인들이 일상의 자연물이나 사물들을 유기체로 다룬 것에 비해 이정란 시인은 비약과 단절로 이루어진 시적 상황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로 인해 장미가 향을 얻기 위한 과정은 몸부림에 가깝게 느껴지며, 또한 여기에서 모든 자연을 인간화된 시선으로 통합해 보는 일을 경계하는 시인의 시선 또한 느껴진다. 말하자면 그런 태도는 시인이 시인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아직 누구도 보지 못한 흙과 얼음의 무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일 것이며, 그 지난함이야말로 해설을 쓴 기혁 시인의 말대로 “시를 썼다는 흔적과 시인 자신을 지워내야만 하는 이율배반의 여정”일 것이다. 이정란 시인은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탄생한 시는 시인의 말마따나 “배고픈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음식물의 떨림” 같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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