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현대시학]에 「월식」 외 4편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김연아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달의 기식자』가 문예중앙에서 발간됐다. 『달의 기식자』는 김연아 시인이 등단 후 10년간 묵묵히 써온 50여 편의 시들을 묶은 시집이다. 등단한 지 10년 만에 빛을 보는 시집인 만큼, 시인이 엄선한 시들로 엮어낸 이 시집은 깊고 튼튼하다.
김연아 시인은 시를 쓰는 동안 한 명의 연기자가 된다. 시를 쓰면서 그는 무엇으로든 변신하기를 소망한다. 백색 무용수로, 흰긴수염고래로, 늙은 사진가로, 심지어 거울로. 시인은 무엇이든지 되고자 한다. 그것이 사람이든 동식물이든 사물이든 가리지 않고 말이다. 이렇게 시인은 시 쓰기의 시간을 통해 자신에게서 벗어나 무수한 타자가 된다. 달리 말해 시인에게 있어 시 쓰기란 ‘타자 되기’이며, 이것은 곧 시가 가진 자유이자 기쁨이다. 시인이 고통 속에서 성취한 자유와 기쁨을, 독자들은 이 시집을 펼침으로써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김연아
저자 김연아는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2008년 《현대시학》에 「흰긴수염고래」외 4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부
흰긴수염고래
북두
달의 기식자
늙은 사진가
모자를 쓴 이름이 지나간다
먼지색 입술에 입맞추네
신원미상의 새
마임의 시간
흰 당나귀의 침대로 돌아오라
염소좌 아래서
거울 너머
2부
천사가 지나간다
익사한 수병의 방문
윌리엄 블레이크가 가네
달의 아들
노래에 갇힌 사람
굿 나잇, 노바디?잠 못 드는 사람 제레미에게
너는 여전히 노란방
솔리터리맨
모래와 안개의 집
월식
침묵에의 초대
아마빛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
그것은 내 이름처럼 지나갔다
Come away with me in the night
3부
시인을 찾는 등장인물들
검은 고독, 흰 고독
백색 무용가
월요일 다음에 화요일이 오고
사막의 정원사
한밤에 난 북역으로 나갔다
재의 만다라
어느 떠돌이 개에게 바치는 송가
깊은 숨
내 말은 월식처럼 어두워졌다
두 개의 귀를 가진 거울
4부
태양의 도서관
겨울은 말한다
피아노의 고독 속으로
구름이 내 방을 끌고 간다
달에 대한 강박관념
흙과 구름의 詩
deep blue day
애먼지벌레의 잠
일곱 번째 작별 인사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눈먼 음유시인
입술에 대한 향수
귀머거리의 말들을 위한 시간
땅거미를 끌고 가는 남자
밤, 쓰기의 시간
2008년 《현대시학》에 「월식」 외 4편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김연아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달의 기식자』가 문예중앙에서 발간됐다. 『달의 기식자』는 김연아 시인이 등단 후 10년간 묵묵히 써온 50여 편의 시들을 묶은 시집이다. 등단한 지 10년 만에 빛을 보는 시집인 만큼, 시인이 엄선한 시들로 엮어낸 이 시집은 깊고 튼튼하다.
김연아 시인은 ‘시인의 말’을 통해 “밤이여 오라, 너를 들이쉬어 나를 낳으리라”라고 말한다. 밤은 나와 타자의 구분을 혼란케하는 시간임을 감안하면 이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밤은 나와 나 아닌 온갖 것들이 뒤섞이는 시간이다. 이러한 혼란과 혼몽 속에서 오래전부터 빛을 밝히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달이다.
오랜 옛날부터, 신화와 역사 속에서 시인이라 불리운 자들은 으레 달을 노래하곤 했다. 나와 타자의 구분을 어렵게 만드는 밤의 시간 속에서 달은 존재를 밝히는 빛이자 나아갈 길을 알리는 길잡이, 혹은 시인을 몽상에 젖게 하는 영감이 되곤 했다. 그리하여 김연아 시인은 밤의 시간에, 달에 기식(寄食)한다. 달의 식객이 된다. 달의 시간 속에서 “밤을 먹어치우고” 시인이 얻어내는 것은 “유랑의 낱말”이다. 시인의 내면으로 들어와 그를 음미하고 창궐하는 이 낱말들의 힘으로 시인은 “흰 종이에 씨를 뿌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달의 기식자
하루에 밤을 먹어치우고
시간의 벌집에서 꿀을 채취하려 한다
그것은 유랑의 낱말
길 밖으로 벗어나
우연에 맡기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끼의 목소리, 새의 모음 같은 것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음미하고
창궐하는 것
--「달의 기식자」 중에서.
스스로를 ‘나’라고 말하는 이 등장인물들
김연아 시인은 시를 쓰는 동안 한 명의 연기자가 된다. 밤의 시간, 달의 시간은 나와 타자가 뒤섞이는 경험을 하는 시간이다. 시인은 달빛에 의지하며 밤을 먹어치우고, 달은 시인의의 심장을 먹고 춤을 추는 시간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자면 밤은 밝을 동안의 사물들이 드러내고 있던 제 옷을 벗고, 그 속에 가려져 있던 내면을 드러내는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김연아 시인의 표현을 따르자면 바로 “다성적으로 소용돌이 치는 시간”이다. 이를 통해 외피를 벗은 존재들은 서로 닮은 존재들이 되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자신과 닮은 것들에 눈길이 가는 것이 사람이며, 그것을 노래하는 자가 시인이다.
그는 시를 쓰면서 무엇으로든 변신하기를 소망한다. 백색 무용수로, 흰긴수염고래로, 늙은 사진가로, 심지어 거울로. 시인은 무엇이든지 되고자 한다. 그것이 동물이든 식물이든 그 밖의 사물이든 가리지 않고 말이다. 이렇게 시인은 시 쓰기의 시간을 통해 ‘나’라는 외피에서 벗어나 무수한 타자가 된다. 달리 말해 시인에게 있어 시 쓰기란 곧 ‘타자 되기’이며, 이것은 곧 시가 가진 자유이자 기쁨이기도 하다.
이 밤에 당신은 아프고 하늘의 깊이로 숨쉬며
참회의 말을 탕진합니다
어떤 언어로 당신을 되돌릴 것인가요?
당신은 거울의 망막
사물이 보는 눈에 자신을 바친 몽상가입니다
그러니 어떤 시제를 가져와야 할지 모르겠어요
--「시인을 찾는 등장인물들」 중에서.
흔히 시 쓰기란 고통이라고들 말한다. 그럼에도 시인들은 그 고통을 기어코 감내하려 한다. 누군가는 시가 구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시 쓰기라는 고통을 기도에 빗댈 수도 있을 것이다. 닿지 못하는 그 기도의 언어들은 아프고 헛되고 무용해 보이지만, 때때로 기도 그 자체만으로 빛나기도 한다.
여기, 김연아 시인이 겪었을 고통과 그에 대한 성취들이 놓여 있다. 시인의 눈길이 닿는 존재들을 따라가다 보면 “기도하는 손처럼 지느러미를/하늘로 들어 올”리는 흰긴수염고래와 만나게 된다. 이러한 이미지과의 마주침이야 말로 결국 시인이 고통 속에서 성취한 자유와 기쁨을 독자가 발견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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