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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현 시인의 시집 『있다는 토끼 흰 토끼』가 문예중앙에서 출간되었다. 2002년 첫 시집 《내 몸이 유적이다》를 발표한 이후 16년 만에 나온 두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에서 “형이상학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비가시적인 생의 비밀, 생의 이면을 들추어낸다”는 평을 받은 이순현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언어와 현실의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신성과 세속의 변증법을 구현해나간다. 일상과 내면, 사건과 경험 사이를 들숨과 날숨처럼 호흡하는 행과 연들은 고난을 통해 성스러움을 복원시키는 헤테로토피아가 되기를 꿈꾼다. 

이순현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 동국대 문예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6년 《현대시학》에 「사진의 뒷면은 백지이다」 외 5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내 몸이 유적이다』(문학동네, 2002)가 있다.

1부 
테이블 위에 
5g의 원근법 
저쪽 
천국보다 멀리 
금방 
스테이플러를 찾아서 
습득물 
인류 
지우도 없이 
마리포사 
있다는 토끼 흰 토끼 
기항지 
비행의 힘 말고 
우유 

2부 
길 킬러 
광장 
관계 
어느 천사의 고백 
홈, 스위트홈 
반감기 
이기적인 수박 
공유지 
A구역 5호점 
미답 
종이 종일 울었다 
말문을 뚫고 
기호 없는 지도 
탐독 
침입자 

3부 
이 하루의 계보 
속표지를 열면 
역광 
슈퍼문 
흰 소 
수난곡 
메아리들의 행진 
1023 
곰 비디오 
메테오라 
크리스마스 
믿음 
새벽의 근황 
에필로그 

4부 
주말 연가 
이것은 달 이야기가 아니다 
메가시티 
목요일의 보증인 
모래여자 
밑밥 
엘리엘리 
각주처럼 
미궁의 입구 
화이트노이즈 
달의 연못 
성간 영역 
나도 모르는 
신인(新人), 신인(神人) 

해설/ 성과 속의 아우라 

나의 자리와 나 아닌 존재들의 자리 
이순현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있다는 토끼 흰 토끼』는 2002년 첫 시집 『내 몸이 유적이다』를 발표한 이후 무려 16년 만에 발표하는 시집이다. 시인이 마침내 두 발을 온전히 시의 자리에 내딛을 수 있었던 16년이라는 시간은 상당히 긴 시간이다. 1996년 등단한 뒤 2002년에 상재했던 『내 몸이 유적이다』까지의 간격이 6년이니, 어느덧 20년을 훌쩍 넘는 시력을 가지게 된 시인이 펴내는 두 번째 시집이라는 사실에는 여러모로 궁금증이 일지 않을 수가 없다. 시(또는 언어)에 대한 시인의 엄정함 때문인지, 세속과 생활 때문인지, 아니면 어떠한 연유가 있는지, 약력을 살피면서 그 시간의 틈을 감지한 독자들은 궁금해하며 이순현 시인의 시집을 들추게 될 것이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은 「테이블 위에」라는 시로 시작된다. 

컵 하나가 있다 
얼음 녹은 물이 찰랑이는 컵 하나가 있다 
컵 가까이 손 하나가 놓여 있다 
유리컵 한쪽에 희끄무레하게 입술 자국이 찍혀 있다 
차오르는 물의 수위가 조금씩 높아지는 컵 하나가 있다 

잠결에 펜 뚜껑을 열고 
머리맡의 메모지에 받아 적는다 

지평선 위에 
컵 하나가 있다 
빙하 녹은 물이 찰랑이는 컵 하나가 있다 
컵 가까이 손 하나가 놓여 있다 
유리컵 한쪽에 희끄무레하게 입술 자국이 찍혀 있다 
차오르는 물의 수위가 높아지는 컵 하나가 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그런 컵 하나가 있었다고 

더듬더듬 적고 난 뒤 다시 잠든 사이 
열린 펜의 꿈도 
울컥울컥 베갯잇을 적셨나 보다 
거대한 테이블 위로 폭우가 쏟아지던 밤 
-「테이블 위에」 전문 

1연과 3연이 거의 비슷하나 조금 다르게 반복된다. 반복의 가운데 “지평선 위에”라는 지평이 생기고, 컵 안의 얼음은 빙하가 된다. 그런데 이 반복을 시인은 “받아 적는다”고 쓴다. 꿈에서 본 그것이 풍경이든, 풍경을 묘사한 언어이든 간에 시인에게는 꿈이 언어과도 같았다고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꿈속으로 들어갔던 시인은 꿈속에서 나와 언어 속으로 잠시 들어가고, 다시 나와 잠든다. 그런데 잠에서 깨고 보니 꿈을 꾼 건 시인만이 아니다. 베갯잇을 적신 잉크 자국을 보며 시인은 그것을 “열린 펜의 꿈”이라고 표현한다. 잉크로 베갯잇을 적신 경험을 두고 그렇게 말함으로써 시인은 단지 사물에 불과할 수 있는 펜에게도 하나의 자리를 내어준다. 그렇게 놓고 보면 1연과 3연의 반복도 펜의 꿈의 자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시집을 여는 첫 시를 지나고 시집 속으로 들어가면 『있다는 토끼 흰 토끼』에 있는 많은 시들이 이곳과 저곳, 안과 밖, 나와 나 아닌 자들이 있는 장소, 풍경 등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아가게 된다. 이 시집에는 “여기로 와서 우는 저쪽”이 있고, “내 안이면서도/안드로메다보다 먼 마을”이 있고, 버스 안에서 조카와 통화를 하는 이모의 자리와 그것을 엿듣는 나의 자리가 있고, 흰 토끼의 자리와 가방에 매달린 흰 토끼가 있고, 촛불들이 타고 있기에 “별안간에 성소가” 되는 광장이 있다. 
『있다는 토끼 흰 토끼』는 시인 자신의 내면과 내력을 읊기보다는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는 사물과 타인의 이미지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는 시집이다. 시집 곳곳에서 발견되는 이쪽이 아닌 저쪽, 타자의 자리를 장소라는 다른 말로 부를 수도 있겠다. 해설을 맡은 조재룡 평론가는 이를 ‘장소 상실의 장소성’이라고 이르며, “이질적인 요소 둘 이상이 공존하는 곳이라 부르는 헤테로토피아는 이순현의 시에서 가장 자주 부각되는 시적 공간이다.”라고 본 시집의 특징을 언급한다. ‘헤테로토피아’는 “일종의 현실화된 유토피아”라는 개념으로 철학자 미셀 푸코가 사용했던 단어이다. 이를 ‘세속에 공존하는 성스러움’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속과 공존하는 성스러움의 현현은 이 시집에서 이곳의, 일상의, 주변의 일들을 ‘저곳의 말’로 옮기는 일로 나타난다. 

한 방향으로 앉아 있는 승객들 
같은 깊이로 숨이 차지는 않을 거야 
스쳐가는 거리에는 언어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없고 

지우야 네 네 
잘했어요 참 잘했어요 

언어가 불어나면 지구 온난화도 빨라지겠지 
지우 이모 옆에 앉은 아이는 양손으로 이어폰을 누르고 
북극 바다의 일각고래가 언 수평선을 뚫고 
참았던 숨을 뱉어낸다 

또 다른 발성기관인 손에게도 숨구멍이 필요하다 
뒷자리에 앉아 있는 나는 
백지를 꺼내들고 조용히 소리 지른다 

… 지우야 이모야 이모 
이모 불러봐 이모…… 
-「지우도 없이」 부분 

시집에 속한 여러 시들에서 행과 연이 들여쓰기와 내어쓰기를 오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의 행과 연들은 들여쓰기와 내어쓰기를 통해 일상과 내면, 사건과 경험 사이를 들숨과 날숨처럼 호흡하며 이쪽과 저쪽의 교섭을 시도한다. 물론 언어를 찾는 일은 쉽지 않은 고통의 과정이다. “지도를 읽으려면/마그마가 숨어 끓는 상처가 필요”하다. 이곳에 있는 일들을 저곳에 있는 언어로 ‘베끼기’ 위해서는 “낱말의 무더기들”을 두고 “새롭게 짜 맞”추어 “피가 돌게” 하는 일이므로 쉽지 않다. 시인은 그러한 고행의 과정 앞에서 “새로운 언어를 위하여”라는 서명을 남긴다. 
물론 그 길에는 무거운 고행만이 있는 건 아니다. 시인이 언어로 바꾸어내는 속세의 풍경들은 무의미하면서도 정감 있고 귀엽기도 하며, 때로는 말놀이가 수반되기도 한다. 시인의 시에 있는 언어유희적인 성격은 고종석 작가가 시인의 첫 시집을 읽어내며 『모국어의 속살』을 통해 밝힌 바 있다. “말들의 덤불” 속에 있는 그에게 “금방 갈게”라고 말하는 「금방」이라는 시에서는 “ㅁ이 녹아내리는 듯/금방은 금방금방 뒤로 밀려나고”, 「우유」라는 시에서는 다리가 하나 모자라서 한 걸음도 떼지 못하는 “ㅜㅠ”가 등장하기도 한다. 
나의 자리를 강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숱한 타자에게 언어로서 존재할 자리를 마련해주는 이 시집을 통해 독자들은 시인의 성심(誠心, 聖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이순현 시인의 말대로 시인의 시는 “언어로 만든 자화상”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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